가정의 나, 가상의 나에 대한 집착
우리는 왜 당당하지 못하고, 왜 주저하게 되며, 왜 매사에 걸리고 장애에 부딪히게 되는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고집과 집착 때문이다.
집착에도 두 종류가 있다. 재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안 놓치려는 집착이 있고 아직 갖고 있지 않지만
앞으로 내가 가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 또는 내가 가져야 한다고 상정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러니까 기성(旣成)의
나에 대한 집착이 있고 가정(假定)과 가상(假想)의 나에 대한 집착, 이 두 종류의 집착이 우리에게 있다.
기성의 나에 대한 집착도 문제지만 가정의 나, 가상의 나에 대한 집착은 어떤 면에서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을 만(慢)이고 하는데 교만(驕慢), 증상만(增上慢)이라고 할 때의 만(慢)이다.
우리는 저마다 ‘나는 이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있다. ‘나는 이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자기 모습은 아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가정의 나,
가상의 나일 뿐이다. 그러나 가정의 나, 가상의 나를 지금의 나로 고집한다.
가령, ‘귀를 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자신이 귀를 열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하면 발끈할 것이다. 자기는 잘 듣고 있다고 당장 반발할 것이다. 그 반발은 귀를 열지
않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귀를 열고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자신은 그렇게 살고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간단한 하나의 예에 불과할 뿐이지만 가정의 나, 가상의 나에 대한 집착이란 것,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평생의 굴레, 인간의 굴레가 된다.
가정의 나, 가상의 나에 집착하면 ‘내가 지금 이렇다’는 것, 있는 그대로를 용인하
지 못한다. 어떻게든 평가를 위장하려 하고 다듬고자 한다. 이미 저질러 놓은 나를 인정하지 못한다. 기성의 나와 가상의 나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 자기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자기 주제파악이 안되는 것이다. 자기 주제파악이
안되는데 발전성이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출발지점의 설정부터가 잘 못되어 있는데 목적지를 제대로 갈
수가 없다. 또 가상의 나라는 허깨비를 붙잡고 있으니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다. 자기 정체성이 없는 자와 무슨 소통이 가능하겠는가?
나의 가능성이란 것, 또 다른 나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 기성의 나에 매여 있는 한 나의 발전 가능성은 없다. 이 모양
이대로 끝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로부터 떠나야 한다. 기성의 나로부터도 가상의 나로부터도 떠나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다.
배영순 (영남대 국사과교수/ baeysoon@yumail.ac.kr)
출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703MW145621865899
